이재철 목사님 설교

전도서에서 말하는 창조주의 충격적인 의미

pass-away 2026. 7. 1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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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월절 만찬을 가지신 그날 밤에 대한 공관복음과 유한복음의 마지막 차이, 네 번째 차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차이는 주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던 장소의 이름에 대한 차이입니다.

공관복음서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그 장소를 겟세마네라고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6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2절입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태복음과 똑같지요.

누가복음 22장 39절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

그러니까 매일 뭐 거의 매일 가셨다는 얘기죠.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누가복음은 "감람 산"이라고 했습니다.

감람이라, 감남나무라는 건 올리브 나무를 의미하죠. 그러니까 "감람 산" 하면 "올리브 나무로 꽉 찬 산"을 의미합니다.

이 감람 산 기슭 아래쪽에 그 산에서 나는 올리브 열매를 가져다가 짓이겨서 기름을 짜는 곳이 겟세마네입니다. 
이거는 그 올리브 산의 아래쪽 기슭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마가복음은 바로 그 기름을 짜는 그 겟세마네.

누가복음은 바로 그 올리브 산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는데, 올리브 열매를 짓이겨서 기름을 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했다.

얼마나 상징적인 표현입니까?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땀에서 피가 배어날 정도로 당신의 진액을 짜내시면서 기도하셨거든요.

그날 예수님 그 당신 자체가 겟세마네였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다 겟세마네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요한복음만은 전혀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요한사도는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요한사도도 따라갔거든요.

그런데 요한사도는 "겟세마네"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절 말씀.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동산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은 30냥을 받고 대제사장의 군졸들을 데리고 바로 그 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2절이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래요.

누가복음 22장 39절은 예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 산을 가셨다잖아요.

럼, 누가복음 22장 39절과 이 본문 18장 2절은 상충됩니다.

습관을 따라가신 것은 자주 거의 매일 가는 것이고.

가끔은 어쩌다가 가는 것이거든요.

헬라의 원문을 보면요. 
우리말 "가끔"으로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가 "폴라키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폴라키스"라는 것은 "자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옛날 성경이 개역한글성경 아닙니까?

그 개역성경의 잘못된 부분들을 보완한 성경이 개역개정성경, 지금 우리가 쓰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 개정판을 내면서 어떻게 이런 결정적인 오류를 이대로 내버려 두는지, 저는 목회하는 사람으로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2절에 그것은 "가끔"이라고 하는 거 동그라미 치시고, "자주"라고 바꿔 놓으세요.

 

자, 여러분,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공관복음 기자들은 그곳을 겟세마네, 감남 산이라고 기록했는데,

요한사도만은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이라고 했는가?

어제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마태, 마가, 누가보다도 요한은 훨씬 더 뒤에 요한복을 썼습니다.

최소 80세 넘어서, 학자에 따라서는 요한이 90세 되어서 썼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에 깊은 통찰력을 가졌을 때입니다.

이 기드론 시내라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동쪽 벽과 감람 산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비가 1년에 며칠밖에 안 오거든요.

그러니까 비가 오는 며칠을 제외하고 나면, 거기에는 비가 오지 않으니까 그냥 황무지 계곡이에요.

그런데 그 계곡이 지표면에서 120m 아래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지표면에서 120m 아래쪽에 있는 계곡은 쓸모가 없잖아요.

그 넓은 계곡을 다른 용도로는 쓸 수가 없으니까,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을 공동묘지로 사용했습니다. 

압살롬이 자기 친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아버지 목에 비수를 겨누고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패했지요.

그 압살롬 무덤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가면 압살롬 무덤이라고 비석이 서 있는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이름이 시내지, 시내가 아니고 공동묘지인 거예요.

 

그러니까 '기드론 계곡을 걷는다.' 하는 것은 실은 무덤의 계곡, 죽음의 계곡을 걷는 겁니다.

요한사도가 "예수님께서 그날 기드론 계곡을 건너서 기도하러 가셨다." 이 이야기는 "주님께서 죽음의 계곡을 지나서 기도하러 가셨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계곡을 무덤의 계곡, 죽음의 계곡이라 불렀거든요.

주님께서 그날 밤에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셨다는 것은 단순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음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지리적인 장소를 지나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표면에서 120m나 낮은 그 절비한 무덤 속을 주님께서 걸어가시면서 당신의 죽음을 확인하신 겁니다.

내가 죽어야 인간들이 살고, 내가 죽어야 하나님 안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당신의 죽음을 주님께서 수용하신 겁니다. 

 

3절 ~ 5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3절)

주님께서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셔서 겟세마네에 도착하셨을 때, 이미 유다가 대제사장들의 군졸을 데리고 주님을 잡으려고 지금 왔습니다.

4절에서 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그들이 오는 걸 보고 "너희들 왜 왔냐?"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를 잡으러 온 것을 알고 "나다. 나 잡아가라."

여러분, 여기에 뭐가 지금 빠져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요한사도가 몰라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로 갈 때 제자들과 함께 가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곳에 너희들 여기 앉아서 기다려라."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특별히 데리시고 더 먼 곳까지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제자에게는 보이시지 않으셨던 주님의 고민과 슬픔을 그 세 사람에게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사 "내가 죽게 되었으니 너희들도 여기에서 깨어 기도하라."

요한사도 다 압니다.

그런데 요한사도는 그 기도를 생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신 다음에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신 이유가 바로 십자가 죽음을 수용하시기 위함임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실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이 뭡니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이 기도를 반복하시면서 실은 아버지 뜻대로 그 잔을 마시는 용기를 얻기 위해서 결국 기도하신 거잖아요.

그거 다 알아요, 요한은. 그게 필요 없는 거야. 
주님께서 죽음의 계곡을 지나시면서 당신의 죽음을 수용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거예요.

내가 죽어야 산다는 걸 확인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자, 나 잡아가."

여러분, 참 이해하기 힘든 게요.

이 계곡의 이름이 기드론 시내라고 그랬잖아요.

거기 시냇물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이기 때문에 그저 공동묘지만 있습니다.

그런데 기드론 시내라는 히브리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요. "백향목의 시내" 입니다. 백향목의 시내. 
그 계곡에는 백향목 한 그루도 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 계곡에 오래전부터 붙여주신 이름은 기드론 시내, 백향목의 시내예요.

현실적으로는 죽음의 계곡, 무덤의 계곡인데 이름은 백향목의 시내입니다.

무슨 의미겠습니까?

자기 인생의 죽음을 통과한 자나 자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확인한 사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 인생은 향기 나는 백향목 집이 된다는 거예요.

당시 백향목은 집을 짓는데 가장 비싼 목재였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죽음을 아는 자만이 주님 안에서 향기로운 자기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압살롬이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아무런 준비 없이 쿠데타를 당했습니다.

황망하게 측근들과 도망가는데 얼마나 급했으면 다윗이 머리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도망갔습니다.

그날 다윗이 맨발로 도망가면서 다윗도 이 죽음의 계곡을 건너서 도망갔습니다.

그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면서 다윗이 뭘 깨달았겠습니까? 
내가 남의 여자와 통관하고 그 여자가 아이를 가지니까 그 남편 아이인 것처럼 거짓 알리바이를 만드려고 하다가 내 뜻대로 안 되니까. 그 충신인 그 여자의 남편마저 죽여버리지 않았습니까?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야.

그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면서 자기의 실상을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성경에서 다윗은 절대로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죽음의 계곡을 통과했던 그 다윗은 그 이후에 그 인생이 향내 나는 백향복의 집, 진리의 집으로 일구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죽음의 계곡을 넘어가실 때 그 예수님을 잡기 위한 바로 유다도 그 죽음의 계곡을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그 지리적인 장소만 통과했을 뿐, 자기가 죽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는 천년만년 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고도 은 30냥의 주님을 배신하고 팔았는데 결과는 뭐였습니까? 천년만년 살았습니까? 

여러분, 창세기 4장 26절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1장 1절부터 창세기 4장 25절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이 비로소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어떻게 그때 불렀을까? 바로 그때가 에노스 때였습니다.

에노스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한데요.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사전을 펴면, 에노스를 이렇게 뜻을 풀이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창세기 4장 26절에 이르러서야 당시 인간들이 죽음의 계곡을 지난 겁니다.

'아, 인간은 죽는구나.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에노스구나.'

그 죽음의 계곡을 통과할 때 그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신학교 다닐 때 여성 작가들과 성경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 여성들인데 그중에 한 분만 남성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북에서 오래전에 간첩으로 난파되었다가 붙잡혀서 감옥에서 오랜 기간 동안 옥살이하다가 전향서를 쓰고 이제 풀려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를 믿었어요.

그런 사연이 있기 때문에 여자 작가가 아닌데도 여성 작가들이 받아줘서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암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참 같이 성경 공부하던 회원들이 같이 많이 기도하고, 또 그분이 치료도 받고 수술도 받고 했는데,

병원에서 어느 날 더 이상 암을 치료할 게 없다고 그래서 이분이 "그러면 완치된다는 증명서를 좀 써주세요." 그러니까 "아니 증명서를 쓸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치료할 암이 없다."라고. 그래서 이분이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그분이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할 암이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제일 먼저 뭘 하신 줄 아십니까?

암에 걸리기 전에 춘천에 불륜을 저지르던 여자가 있었는데, 암이 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다 관계 끊었거든요. 
"더 이상 치료할 암이 없다"는 사실 '내가 건강해졌구나.' 확인하는 순간에 그 여자 만나러 춘천에 갔습니다.

그러고 몇 년 후에 그분은 다시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암이라는 육체의 죽음의 계곡을 통과했는데, 육체의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면서도 그의 영은 자기가 "에노스"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가룟유다의 죽음하고 유사한 점이 있죠.

가룟유다가 그날 밤에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고도 예수님 팔아먹어버리지 않습니까?

 

여러분, 전도서 12장 1절 말씀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하루라도 빨리 너의 하나님을 의뢰하는 삶을 살라는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요.

여기에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이 창조주를 "무덤"으로 바꿔서 읽기도 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무덤"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

왜 그렇게 하는가? 
3천 년 전에 솔로몬의 전도서를 쓸 때 히브리 말에는 히브리 글자에는 자음만 있고 모음이 없었습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제 이름이 이재철 아닙니까?

그러면 "ㅇ"에다가 이건 자음이죠. "ㅣ" 모음을 붙이고.

"ㅈ"에다가 "ㅐ" 모음 붙이고.

"ㅊ"에다가 "ㅓ" 하고 "ㄹ"을 붙여야 "이재철"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음이 없기 때문에 "이재철" 이름을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어떻게 쓰는가? "ㅇㅈㅊ"만 쓰는 거예요.

그리고 약속으로 이걸 "이재철"이라고 읽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무덤이라는 단어가 자음이 "창조주"하고 똑같았습니다.

모음은 붙이면 발음이 달라지는데, 자음 글자는 똑같은 똑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이렇게 읽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무덤을 기억하라."

"하루빨리 죽음의 계곡을 통과해라. 그래야 네가 일평생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의뢰하게 된다." 

여러분, 우리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 아닙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은 갈 때는 순서가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 연세가 제일 많이 드신 분이 계신다고 그분이 제일 빨리 가는 것 아니고요.

여기에 나이가 제일 작은 청년이 있다고 그 사람이 제일 늦게 가는 것 아닙니다.

오늘 밤에 누가 갈지 모릅니다.

 

여러분, 오늘 밤에 우리 함께 기드론 계곡, 죽음의 계곡을 건너가십시다.

우리 모두 "에노스"인 것을 확인하십시다.

하루라도 빨리 "메멘토 모리" 우리가 관에 드러눕는 우리의 무덤을 생각하십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내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진짜 예수쟁이들이 되십시다.

내가 세상에서는 비록 보잘것없고, 내가 가난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영원한 백향목의 집",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향기로운 진리의 집"으로 우뚝 세워 주실 것입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_Jz2EkobzQY] 이재철 목사 설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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