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님 설교

성경공부 열심히 한다고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pass-away 2026. 7. 1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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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하이데거는 "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대단히 심오한 표현인데요.

이것을 아주 단순화해서 설명하면 "한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는 그가 사용하는 말로 입증된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한평생 선한 마음으로 참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한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등을 치면서 살아온 사람이 사용하는 말이

결코 동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존재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먼저 그가 사용하는 말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하는 말이 바로 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저를 믿으신다면, 제가 여러분들께 드리는 말씀을 여러분들이 믿어주실거예요.

제가 여기에서 계속 말을 하는데, 여러분들이 속으로 '저거 아니야. 저 새빨간 거짓말이야.'

그러면 여러분들은 제 존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말이 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말 자체의 의미와 신뢰를 상실해버린 용어들을 계속 사용한다면, 여러분들이 저를 신뢰하기는커녕 오히려 제 저의를 의심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십시다.

"여러분, 저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합니다. 애국애족은 일평생 흔들림 없는 제 좌우명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제게 천만금을 준다 할지라도, 제 마음속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애국애족심을 빼앗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 속으로 '저 사람 왜 저래? 내년 총선에 출마하나?'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연세 드신 분들은 다 아시겠습니다마는 50년대, 60년대, 70년대까지 "애국애족"이라는 단어는 보편적으로 쓰였습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이들도 "애국애족"을 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지금 그 단어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치인들이 오직 당리당략과 자기의 권력욕을 위해서 살면서도, 단지 표를 얻기 위해서 "애국애족"을 남발해온 결과입니다. 그가 "애국애족"을 그들이 부르짖었는데, 그들의 삶은 전혀 민족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만 축제하고 치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사용하던 "애국애족"이라는 말이 신뢰를 상실해버렸습니다. 힘을 잃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말을 사용하면, 그 단어를 사용해서 자기 권력적인 야욕을 채운 정치인들이 될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잃었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말 자체가 신뢰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인들이 말한 대로 안 사는 것입니다.

말은 정치인처럼 번지르르하게 하는데, 그 삶은 말과 딴판이면 그리스도인들끼리는 통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말에 대해서 아무런 신뢰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외칩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서, 사랑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의 몫을 희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외치면서도, 교회 밖 세상 사람들보다도 자기의 몫을 더 확장하기 위해서, 영악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면서까지 이기적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외칩니다.

그러나 목사, 장로가 싸우는 거 보세요.

교인들끼리 싸우는 거 보세요.

평화가 있습디까?

평화를 경작하기 위해서는 나의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평화를 얘기하면서도 아무도 자기 옥합은 깨뜨리지 않습니다.이건 돈터치.

 

교회는 용서를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믿지 않는 사람한테 "형제여,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 말 믿겠습니까?

교인들끼리 싸워서 세상 법정에 가서 최고 대법원의 판결이 나도, 교인들 간에는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는 말하는데, 용서하기 위한 고통과 고뇌는 감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용서입니다. 

그 고통을 감수해야 되는데, 그 고통은 뒤로 제쳐놓고 용서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사회 정의를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나 교회로 인해서, 사회 정의가 확립되었다는 이야기를 여러분들 몇 번 들으셨습니까?

사회 정의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공동선, 공동의 유익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정의를 외치긴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면서까지 자기 사익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을 믿겠습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사랑, 평화, 용서, 정의.

여러분들이 100번 외쳐도 그건 허공을 향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그 신뢰를 상실한 용어들의, 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말대로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도의 간디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예수는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말만 할 뿐 예수의 말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 곱씹어 봐야 할 말입니다. 

전 세계를 다녀봐도 한국 그리스도인들만큼 성경 공부에 열심인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도 주일 난 예배 드리시고 이 저녁 시간에 피곤한 시간에 여러분들 쉬셔야 되는데 또 나오셨습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특심한 열심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합니다. 잘 압니다. 

그런데 그대로 삽니까? 안 삽니다. 공부하는 것 자체만 즐깁니다. 이야기하는 것 자체만 즐깁니다. 

이제부터, 교회는 사랑을 외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교회 밖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 몫의 감소를 웃으면서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누군가와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

각자의 옥합을 주님의 이름으로 미련 없이 깨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정말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  세상을 용서하기 위해서,

용서하는 고통과 그 고통이 수반하는 희열을 삶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땅에 사회 정의를 확립하기 위해서,

정의만 외칠 것이 아니라 사회 정의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자기 희생과 자기 헌신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신뢰 없는 허공을 두드리는 메아리에 불과한 그 말들이

회복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신뢰를 상실한 용어들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것과 병행해서 시급하게 시행되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는데요. 

바로 교회 이름을, 그 교회 이름의 의미와 정신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에는 교회 이름이 다 동네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70년대 대부흥기를 거치면서 더 이상 교회는 교회 이름을 동네 이름을 짓지 않습니다.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이름을 짓습니다.

의미 있고 아름다운 특별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공동체의 공동체적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 속에서 살겠습니다.' 선언하는 것이 교회 이름입니다. 

그런데 교회 이름은 지을 때뿐이에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교회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도 않습니다.

그런 허울뿐인 이름, 그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구성원들조차도 자신들의 공동체적 선언을 지키지 않는 허울뿐인 이름의 교회가 이 땅에 골목 골목을 채우고 있다고 한들 그런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까?

 

교회 이름에 거룩할 성(聖)자가 들어있는 교회가 많습니다.

어떤 공동체적 고백이겠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선언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 이름은 거룩할 성(聖) 자를 붙이고, 그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속된 삶을 산다면,

그 교회 교인들 스스로 자기 교회 이름을 짓밟는 것입니다.

빛 광(光)자가 들어가는 교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교회가 되겠다는 선언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들이 욕망의 어둠에서 맹인처럼 살아간다면, 그들 또한 자기 교회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충성, 충(忠)자가 들어가는 교회도 많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면서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이 정작 충성하고 있는 대상이 자기 욕망에 불과하다면, 그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까?

전국적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교회 이름이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대로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사랑장으로 불려지는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이 사랑을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대한민국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교회 교인들이

교인 간에 혹은 교회 안과 세상 밖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런 사랑을 실천한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실생활은 전혀 딴판이면서 교회 이름만 사랑을 가져다 붙인다면, 그것 또한 주님의 사랑을 희화화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이름은 짓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 이름을 짓는 것보다 그 교회 이름을 공동체의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그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그 교회의 이름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교회의 이름들이 힘을 가질 것입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교회의 이름에 신뢰를 던질 것입니다. 
허울뿐인 이름이 아니고 명실상부한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도처에 생겨날 때, 그런 교회들에 의해서 세상은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MIIhzdApa3I] 이재철 목사 설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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