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병장수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어서 예금 통장에 잔고가 늘어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해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진짜 예수쟁이들입니까?
그 사람들은 정말 회계의 삶을 살기 때문에 무병장수하고 경제적으로 덕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6장에는 그 유명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문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나는 누구니?"
그랬더니,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그리스도. 구원자라는 말이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러분 사람의 아들은 아무리 비천해도 사람입니다. 개의 새끼는 아무리 비싼 명견이라도 개 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에게 "당신이 하나님 아들입니다."하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당신도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주님과 베드로 간에 그 문답을 주고받은 그 장소가 가이사랴 빌립보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가이사랴 빌리보는 분봉왕 해롯 빌립이 로마 황제 카이사르를 위해서 신도시, 대도시를 만들고 그 도시에 로마 황제의 칭호 카이사르를 붙이고 자기 이름 빌립을 붙여서 "가이사랴 빌리보"라고 명명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이름이나 카이사르 칭호가 붙은 도시에는 반드시 그 도시의 가장 중요한 지점에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인간으로부터 경배받는 지상의 신이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이 구원자요, 당신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그 황제의 도시에서, 저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는 로마 황제가 하나님이 아니라,
비록 남루한 행색일 망정, 나사렛 예수 당신이 하나님입니다.
당신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삼권을 장악하고 있는 로마 황제가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가 아니고 바로 당신이 구원자십니다.
주님께서 반석과도 같은 그 베드로의 고백을 받으시고 그 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천명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란 주님을 구원자로 주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나 장로 헌금 많이 하는 교인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신다고 했거든요.
이처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께서 어떤 존재이신지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이심이 밝혀졌기 때문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실지를 비로소 밝히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 때로부터", "이 때"는 예수님께서 구원자시요, 성자 하나님이심이 밝혀진 이 때로부터.
이 이전까지는 이 구원사역을 제자들에게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지만 주님이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걸 모르고 있었거든요.
제자들이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당신이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는 제물로 돌아가시고.
그리고 당신이 사흘째 되는 날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구원사역을 밝히신 거예요.
마태복음 17장 22절에서 23절입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주님께서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십자가 고난,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7절~19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지금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입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어디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제자들을 무리에서 떼어서 따로 데리시고 길가에서 얘기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얘들아, 우리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왜 올라가는지 너희들 다 알지?"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세 번째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마태복음 16장 이후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왜? 그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를 살리기 때문에.
마태복은 16장 이전에서 내가 병이 들렸는데 예수님에게 가서 만나서 병이 나았다고 하십시다.
그 사람이 영생합니까? 아닙니다.
육체의 병이 아무리 나아도 우리 육체는 때가 되면 흙으로 소멸합니다.
이 흙으로 소멸하는 인간들을 영원히 살게 하시는 방법은 십자가와 부활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이후부터 모든 마태복음의 포커스는 십자가와 부활에 맞춰지는 거예요.
바꾸어 말하면,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태복음 16장 이전에서 육체가 무병장수하고 경제적으로 태산 같은 돈을 쌓고 큰소리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표대로 삼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뭔가 마태복음 16장 이전 상태에서 마태복음 16장 이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숙이 있고 원숙이 있습니다.
넘어가지 못하면 참된 믿음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16장 이전에서 마태복음 16장 이후로 넘어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까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구원자시요, 성자 하나님이심을 밝혔기 때문에, 고백했기 때문에, 그 고백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을 천명하시고,
그때로부터 비로소 이제 당신의 고난과 부활을 밝히셨잖아요.
그게 구원사역의 핵심이니까.
그래서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대제사장과 장로들한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거다.
마태복은 16장 22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가 베드로를 붙들고 "프로슬람바노", 붙들었다.
여러분, 제자가 스승을 함부로 붙들 수 있습니까?
지금 방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당신이 성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붙듭니까?
이 단어 뜻은 옷자락을 낚아챘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낚아채면서 항변하여 이르되 항변하다. "에피티마오", 야단쳤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을 야단치는 겁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죽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우리나라 성경은 고상하게, 아주 젠틀하게 예의 있게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헬라어에는 존댓말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을, 베드로 심정 뉘앙스 그대로 옮긴다면, 예수님의 옷자락을 탁~! 낚아채면서, "너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 너한테는 그런 일 절대 안 일어날 거야."
방금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예수님에게 어떻게 이렇게 불경한 짓을 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가 입으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지만, 그의 심중은 여전히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 이전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난을 당한다.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 이 하나님이 잠시 착각했구나.' 내가 옷자락 잡고 야단쳐야지 '너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런 소리는 절대 일어나지 않아.'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이 구절을 뒤집으면 무슨 말이 됩니까?
"나를 따르려거든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라." 이 말을 뒤집으면.
"네가 아무리 나를 쫓는다고 해도 네가 너를 부인하지 않으면, 네가 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너는 나를 쫓는 거 아니야?"
"너는 나를 쫓는다고 착각하는 종교적인 열심가일 뿐이야." 그 말이예요.
"니가 나를 따르려거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그 자기가 어떤 자기입니까? 마태복음 16장 이전에서 자기 육체의 안일만 꾀하는 자기를 부인해라.
그거 부인하지 않으면 마태복음 16장 이후로 넘어오지 못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2천 년 전에 십자가는 사형수를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하면 당시 사람들은 다 아는 거죠.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너 스스로 십자가에 너를 못 박아라. 니 자신을 죽여라. 어떤 자신을?
마태복음 16장 이전의 너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으면, 너는 결코 마태복음 16장 이후 십자가의 예수와 부활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마태복음 16장 25절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누구든지 구원하고자 하는 제 목숨은 어떤 목숨이에요? 마태복음 16장 이전 목숨입니다.
마태복음 16장 이전에서 누구든지 더 잘 사려고 더 건강하게 사려고, 더 오래 사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은 잃을 것이요.
한 줌의 흙으로 소멸될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누구든지 십자가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마태복음 16장 이전의 자기를 못 박으면, 찾으리라. 영원한 생명을 찾으리라.
두 번째 질문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 교인들 대부분이 바라는 것.
무병장수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손대는 사업마다 다 잘되는 것, 자식들이 다 잘되는 것, 그건 믿음이 좋기 때문입니까?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까?
그 장본인이 회계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제 방금 앞에서 바울의 경우를 들어서 말씀드렸지만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병이 들어서 교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습니다. 내가 건강해지려고.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정말 주님의 은혜로 경제적으로 좀 넉넉하게 살고 싶어서 교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전도할 때 그렇게 하시잖아요.
교회 오면 병 낫는다, 교회 오면 일 잘 된다고, 그래서 나의 병약함과 나의 가난함은 교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좋은 동기부여가 됩니다.
그런데 평생을 '나는 무병장수하고 돈 많은 사람으로 살 거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갇힌 사람이고,
그 사람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여러분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요. 자기 변화 유무에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절대 생명인 것을 알아서, 그 진리 앞에서 나를 날마다 부인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변화해가요.
마태복음 16장 이전의 사람이 16장 이후의 사람으로 십자가의 사람으로 변화해 갑니다.
미신은요.
내 주머니에 있는 돈과 나의 재주로 신을 달래고 어르워서 신을 변화시킬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이런 거 할라는데 "신, 당신이 좀 봐줘요."
미신은 절대 자기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당을 찾아다니면서 하루 저녁에 수천만 원짜리 굿하는 사람이 '굿을 10번 했더니 그 삶이 거룩해졌다.' 그런 거 봤습니까?
굿을 하면 할수록 욕망 덩어리가 됩니다.
평생 내가 예수를 믿는데 마태복음 16장 이전에만 내가 머물러 있겠다.
그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미신입니다.
내가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을 다해도 십자가와 무관합니다.
십자가와 무관한 사람, 부활과 무관한 사람은 주님과도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16장 이전에 있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자기의 그 삶의 정황을 좋은 믿음의 동기부여로 삼아, 16장 이후로 넘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6HggOR7GXwM] 이재철 목사 설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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