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반도체의 최초의 재료가 모래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래는 아무 쓸모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래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추출해서, 수많은 정교한 과정을 가하면 칩을 얻습니다.
이 칩은 조만한데, 더 이상 모래가 아닙니다.
그 칩 속에는 수없이 많은 정보가 들어갑니다.
그 칩을 가지고 있으면, 미국에서든 캐나다에서든 유럽에서든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어디서든지 그 칩을 열어서 그 안의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티끌로 살 때에는 허무한 하이픈(-, hyphen)으로 내 인생이 끝나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기 안에서 생명으로 살면,
내 코끝에서 호흡이 끝나는 순간에, 내 인생이 비석에는 비록 짧디 짧은 하이픈으로 기록된다 할지라도,
그 하이픈은,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칩"으로 승화합니다.
우리는 3천 년 전에 다윗의 삶을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가 다윗의 이 시를 읽을 때, 흔히들 착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고 강력한 군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없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심으로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결핍투성이였습니다.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양치기였던 다윗은 이스라엘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골리앗을 물리침으로써 구국의 영웅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울왕이 그 다윗을 질투해서 죽이려고 해서, 다윗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 특공대 3천 명을 구성해서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10년 동안 도망다녔습니다.
다윗의 장남 암논이 다윗의 딸 다말를 강간하고 버렸습니다.
다말의 동복 오라비 압살롬, 역시 다윗의 아들이죠.
아들 압살롬이 자기 누이동생을 강간하고 벌인 장남 압논을 척살에서 죽였습니다.
내 자식이 내 자식을 죽인 거예요.
압살롬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의 목에 칼날을 갖다 대고 아버지의 왕좌를 뺏으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급했던지, 신도 신지 못하고 머리도 빗지 못하고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말년에는 세바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에는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요압 군대 장관이 자기 무리를 이끌고 역모를 일으켰습니다.
다윗의 일평생은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결핍했기 때문에, 세상의 결핍 때문에 그는 오직 여호와만 자기의 목자로 삼았습니다.
다윗이 세상에 결핍함이 없었더라면, 그는 세상에 누리는 것 때문에 여호와를 절대로 자기 목자로 삼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19장에 돈이 많은 청년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이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얘기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계명을 지키거라."
"계명요?"
"아니, 어떤 계명을 지키라는 겁니까?"
"니 이웃을 사랑해라. 도둑질 하지 마라. 니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이런 계명을 지키라."
그랬더니, 부자 청년이요.
"아유~ 선생님, 저 그런 계명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는 사람은요.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지킬수록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비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자비 속에서만 우리는 말씀을 쫓을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은 자기가 말씀 다 쫓았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착각하는가? 돈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요. 사람들이 왜 자기 앞에서 굽신거리고 굴복하는지를 착각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이 모여들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옳다 하고 그 사람을 칭송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인격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주머니에 있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부자들은 대개 자기 믿음이 좋아서, 자기 인격이 출중해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굽신거린다고 생각합니다.
이 청년이 그런 거예요. 이 청년에게 있어서는 돈이 우상이에요.
돈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장애물이에요.
이 청년이 결핍이 있어야, 하나님을 목자 삼을 터인데, 이 청년은 돈이 다 해결해 주니까 하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 가서, 니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한테 다 나눠주거라. 그리고 다시 나를 쫓아와라."
그 얘기는 뭐겠습니까?
니가 가진 재물을 우상으로 삼는 니 마음속 재물의 우상을 깨뜨려라.
그 재물의 우상을 깨뜨리기 전에는 너하고 나하고 접촉점이 절대 있을 수 없다.
마태복음 19장 22절입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청년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결핍이 없습니다. 재물이 많습니다.
재물 때문에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다윗은 결핍이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결핍 속에 있습니까?
경제적으로, 건강상으로, 지금이야말로 여호와만을 여러분의 목자로 삼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하신 은혜의 기회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젊었을 때부터 성공하려고 합니다.
젊었을 때부터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잠언서 20장 21절입니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젊어서부터 결핍이 없으면, 그 삶은 절대로 복될 수 없다.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에서 동사가 현재형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푸른 풀밭에 현재형으로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현재형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게 세상에 결핍이 너무 많아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나의 목자로 삼았을 때,
그분이 내일 혹은 모레 혹은 한 달 후에 나를 푸른 품밭에 눕게 하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지금"이라는 거예요.
지금 다윗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결핍투성이예요.
그런데 결핍투성이인 니 상황이 주님께서 너에게 주시는 쉴 만한 물가이고 푸른 초장임을 알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가 원하는 꽃방석에 앉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꽃방석은 우리를 타락시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은 내 계산하고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상황이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눈물겨울 수 있습니다.
이 절망의 터널이 언제 끝날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이 상황이 주님께서 나를 위해 빼고 빼신 쉴 만한 물가요, 푸른 초장임을 알 때,
주님의 손길이 나를 사로잡아 주시는 거예요.
다윗이 시편 34편 9절에서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TV에서 그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을 보면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가 늙으면 사냥을 못하지 않습니까?
사냥을 못하면 사자무리가 버려요.
그러면 늙은 사자가 굶어 죽는 영상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또는 다른 맹수들에게 공격당해서 찢겨 죽는 영상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늙은 사자는 혹 죽을지라도 젊은 사자는 굶주리는 법이 없습니다.
젊은 사자는 그야말로 백수의 왕이거든요. 그런데 뭐라 그럽니까?
"젊은 사자는 궁핍해서 죽일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글자 그대로 보면 '야~ 다윗이 성공했구나. 다윗이 지금 다 가졌구나.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는구나.'
천만에요. 시편 34편 표제어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영내는 더 이상 숨을 데가 없어서
적국으로 가서 몸을 피하고
그 적국에 있는 장군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죽이려고 해서 거기서 미친 사람처럼 침을 질질 흘리고
그리고 나와서 지은 시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죽일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지금, 방금 미친 짓거리하고 침을 질질 흘리고 살아나와서 다윗은 뭘 깨닫는 거예요?
내가 지금 미친 짓거리하고 침을 흘려도 이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만들어주신 쉴 만한 물가요, 푸른 초장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간에 그 상황이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예비해 두신 푸른 풀밭, 잔잔한 쉴 만한 물가인 것을 내가 알고 받아들일 때,
주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어떻게?
티끌인 내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생명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도록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시편 34편의 미친 짓거리하고도 그런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빌립보에 가서 감옥에 갇히지 않습니까?
그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혀서 억울하게 매맞고 발에 차꼬가 채이고 아무 잘못 없이 귀신 들린 여자를 구해줬다는 죄 아닌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감옥에서 한밤중에 찬양을 할 때 주님께서 감옥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그 감방이 가시방석이구나 라고 생각했으면 감옥 문이 열리는 순간에 그대로 튀어나가서 도피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 감옥의 간수들 전부 사형입니다.
감옥 문이 열렸는데 발에 채워진 차꼬가 풀렸는데 바울은 감옥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왜? 이 감옥 안이 주님께서 오늘 밤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쉴 만한 물가요, 푸른 풀밭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그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이 구원받고 세례 교인이 되었습니다.
바로 내가 지금 가난하면 나의 가난을 통해서, 내가 병들었으면 나의 병약한 몸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신 이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주님께서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므로 내 영적 상태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하는 겁니다.
4절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구절을 보면 당혹스럽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나를 사망의 음심한 골짜기로 데려가지 마시지, 왜? 데려가 놓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또 구해주시는가?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시나.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을 갖고 노시는 게 취미인가?'
여러분, 내가 평탄한 길을 걸어가면 평탄한 길을 하루 종일 걷는다 한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지켜주심을 내가 확인할 수 있습니까?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에서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지키고 계신다는 걸 내 눈으로 똑바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망의 음심한 골짜기로 떨어뜨리셔야 돼요.
거기에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신다.
지팡이, "미쉬에넷", 양을 끄는 도구예요.
그 대개 이 양을 끄는 도구 지팡이는 끝이 이렇게 휘어져 있습니다.
만약에 양이 도랑이나 절벽에 떨어지면 휘어진 부분을 밑으로 해서 양의 목을 걸어서 끌어올리거든요.
그게 지팡이고.
막대기는 뭐냐? 막대기는 막대기 아니고, 꼭 우리나라 자치기 하는 막대기.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이 막대기, "쉐베트"는 맹수를 물리치는 몽둥이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양을 인도하는 지팡이. 그런데 갑자기 늑대가 나타났다. 그러면 목자가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가서 늑대를 쳐서 이기는 겁니다.
내가 사망의 음식만 골짜기로 떨어져야 주님께서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시고,
내게 도전하는 모든 사람을 당신의 방망이로 물리치시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욥이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욥기 23장 10절입니다.
"~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여러분 순금이 팬 위에서 나옵니까? 냄비에서 나옵니까? 아닙니다.
순금은 풀무불에서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금처럼 제련시킬 때 우리를 풀무불에 집어넣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두 손 들고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5절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배설해 주셔요. 그리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옛날 유대인들은 파티에 초청을 받아가면 고급 파티 지체가 높은 사람이 초청하는 파티일수록 고급 향유를 자기 수염과 머리에 바르고 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그 상황을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떨어뜨리신 사망의 음심한 골짜기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 다윗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일평생 다윗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많았습니다.
다윗이 불의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의로움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불의한 사람들이 다윗을 대적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높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오. 의로운 길을 가보십시오. 사람들이 박수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박수치는 듯하지만 저 사람이 의롭게 삶으로 나와 비교되고 내가 불의한 것이 드러난다. 모함합니다. 시기합니다. 질투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사람들 앞에서 상을 베푸시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고백이 이렇게 끝납니다.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대접하시고 높여주시니, 앞으로도 나는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살겠습니다.
여호와의 집이 어디 있습니까? 캐나다에 있습니까? 미국에 있습니까?
말씀의 집이죠. 하나님의 말씀의 집 속에 거하겠습니다.
자, 이렇게 3천 년 전에 산 다윗은 어떻게 되었나요?
다윗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입니다.
그리고 사망지는 예루살렘입니다.
베들레햄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10km입니다.
현지 길을 자동차를 타고 가면 10분 걸립니다.
다윗은 70년을 살았습니다.
다윗의 인생 역시도 하이픈(-, hyphen)으로 끝납니다.
그 하이픈, 생존 기간 70년, 사망지에서 출생지에서 생존지까지의 거리 10km, 자동차에 의한 이동 시간 10분, 그게 다윗의 하이픈 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그 하이픈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칩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그 다윗의 칩을 열면 사무엘상으로, 사무엘하로, 열왕기상으로, 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우리에게 무궁무진하게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그 칩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영원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다윗만 이렇게 된 거 아닙니다.
그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1483년에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63세 되던 1546년에 고향을 찾아가서 고향에 있는 예배당에서 설교하다가 죽었습니다.
마틴 루트가 태어난 집에서 마틴 루트가 설교하다가 죽은 예배당까지의 거리는 200m밖에 안 됩니다.
마틴 루트 하이픈, 거리는 200m, 생존 기간은 63년, 500년 전의 마틴 루트가 3천 년 전에 다윗보다 더 짧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틴루트의 하이픈 역시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칩으로 승화되어서, 오늘도 전 세계 수많은 교회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1년 중에 가장 속기 쉬운 연말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5주가 지나면 2025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새해가 가까워지면 모두 마음이 설렙니다.
가만히 있어도 달력 상으로 새해가 오기만 하면, 달력을 새것으로 교체하기만 하면, 진짜 새해 새날이 올 것 같은 착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평생 달력을 몇 번이나 갈았습니까?
달력을 수십 번 갈아도 달력을 교체한다고 새해가 됩디까?
절대 되지 않습니다.
달력을 교체하고 나면 새해의 흥분은 불과 2, 3일.
2, 3일 지나면 사람들이 새해라고 부르는 그 해 역시도 묵은 해의 연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간과 공간의 지배 속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소멸합니다.
이 세상에는 새 것이 없습니다.
새 것이 있을 것이라고 속고 착각할 뿐입니다.
새 것은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시편 23편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영원하신 말씀의 집 안에 거하는 이 시대의 다윗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죄로 상실한 하나님의 영원한 생기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신 주님 안에서 회복하게 해 주시고,
5주 후에 맞게 될 2025년이 더 이상 묵은 해의 반복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진정한 새해, 새 시간으로 엮어지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승부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의 코끝에서 숨이 멎는 날, 우리 인생의 허무한 하이픈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칩으로 승화되는 것으로 판가름 남을 잊지 말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9iDKuWD6yOw] 이재철 목사 설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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